빈집.
여자는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온다.
켜진 날보다 켜지지않은 날이 많은 티비, 혼자서만 잘 수 있는 크기의 침대, 낮잠 용으로 사용하는 소파 가 놓였던 자리가 비어있다. 여자는 주방으로 들어가 찬장 문을 연다. 그릇의 얼룩이 원래 있던 사물들의 부재를 대신하고 있다. 거실로 가서 벽에 붙은 보일러 전원 버튼을 누르고 넉넉한 온도로 설정한다. 이젠 기름이 떨어질까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한다.
이사를 했지만 여자는 아직 떠나지 않은 집에서 잠을 잔다. 침대 없이 바닥에 한 장의 스코틀랜드 산 울 담요를 깔고 또 한 장을 덮는다. 미지근한 온도감이 등을 타고 몸 전체로 번진다. 여자가 뒤척일 때마다 딱딱한 바닥과 여자의 등 사이에 놓인 담요가 미끄러지며 큰 굴곡을 만든다. 여자는 모처럼 깊고 곤한 잠을 잔다.
씽크대에는 하나의 냄비와 수저와 젓가락, 두 개의 접시와 연두색 플라스틱에 반쯤 남은 세재와 비누가 있다. 여자는 씽크대의 물을 틀어 냄비를 가볍게 씻고 라면을 끓이는 동안 가끔 창밖의 언덕을 응시한다.
대나무 숲이 있는 언덕 꼭대기로 빛이 퍼진다.그 빛은 지난 겨울 , 키가 큰 풀들과 덤불과 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벗나무를 비추며 마당에 긴 그림자를 만든다. 지난 가을 떨군 낙엽들이 바스락한 모양으로 바람에 쓸려 돌담 아래 쌓여 있다.생의 잔해처럼 최후의 것들만 남겨진 집에서.
매년 삼월 이십 사 일 같은 계절을 벗어 허리춤에 묶는다.봄비가 내리기 전, 수분을 먹은 공기가 후덥하게 느껴졌지만 여자는 검정색 니트를 입고 가벼운 울 목도리로 목을 한 바퀴 돌려 감는다.
비워진 라면 냄비를 씻어 낸 후 고구마 몇 개를 씻지 않고 넣는다. 가스 불을 약하게 설정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고구마는 아주 천천히 익어 갈 것이다.
책상 옆에 놓인 가스 히터 버튼을 눌러 2단으로 작동 시킨다. 여자는 벽으로 가서 액자 앞에 선다. 과거로 물러난 한 때, 현재의 기억이었던 순간이 담긴 액자가 벽에 걸려있다. 언덕, 대나무 꼭대기에서 떠오르던 아침의 빛, 토마토와 대파, 상추와 쑥갓의 영역을 점령해버린, 텃밭의 나무만큼 커버린 잡풀들과그 위로 굉음 소리를 내며 지나다니던 비행기들, 배경처럼 머물던 붉은 서쪽 하늘.
고구마가 익었다. 뜨거운 고구마를 접시에 한 개씩 옮겨 담고 냄비를 씻고 방으로 들어 온 여자는 현재였던 과거를 벽에서 떼어내 박스에 담는다. 못을 만져보고 흔들어 본다. 무언가를 기다리 듯 못은 견고하게 박혀있다. 한 개의 작은 흔적은 3월 24일의 온도로 드러난다. 여자는 검정 니트를 벗어 못에 걸고 삶은 고구마와 박스를 들고 거실로 나간다. 박스에는 몇 개의 사물들이 담겨있다. 집을 완전히 떠날 때까지 필요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더 이상 쓰지 않은 칫솔, 쑤세미, 락스, 세제 같은 마지막 청소도구 등이다.
여자는 마당으로 나간다. 빛은 머리 위에 있고 벚나무 그림자 키는 작아졌다. 놀러갔던 고양이들이 어디선가 와서 소리없이 여자의 발 옆에 와 있다. 임시 물건이 든 박스와 스코틀랜드 산 울 담요 두 장과 고구마, 고양이들을 차에 실은 후 여자는 다시 한 번 기억을 봉인하기 전 의식처럼 천천히 마당을 걷는다.
낙엽이 쌓여 늪이 되버린 우물 앞, 그 안에서 울던 맹꽁이들의 울부짖음을 듣는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자두와 매실 꽃을 본다. 지난 가을 밤을 구워 먹던 화로와 마당을 쓸던 대나무 빗자루가 삽과 함께 할 일을 잊은 듯 벽에 기대어 있고 어느 집 정원에서 얻어 온,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꽃 식물이 말라 죽어 있다. 빈집의 고목에는 머지않아 벚꽃이 찬란하게 필 것이나 그 전의 마당에는 황량하고 스산한 매년 삼월 이십 사일 공기로 남겨질 것이다.
여자가 집을 떠나고 벚꽃이 피었다. 마당에 벚꽃 비늘들이 바람에 돌담쪽으로 무리지어 구른다.한 사람이 빈 집의 현관 문을 연다. 집 안은 봄의 생명력과 다르게 숨죽어 있다. 창을 통해 대나무 언덕에서 들어 온 빛이 벽에 걸린 검정 니트를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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